서울경제ㅣ 2024-08-16
- 이찬주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교수
-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AI 의료기기 ‘닥터눈’ 선제 도입
- 간단한 망막 촬영으로 심혈관위험 평가…CT 정확도 갖춰
- 심뇌혈관계 위험인자 보유시 일차예방 힘써야 합병증 차단
“심혈관 위험점수가 35점으로 나왔네요. 위험도로 따지면 중간 단계라 제법 잘 관리하고 계신 걸로 보입니다. 그 연세에는 심혈관 위험점수가 50점을 훌쩍 넘는 고위험군 환자도 많거든요. ”
“교수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한결 마음이 놓이네요. 고혈압, 고지혈증에 부정맥까지 생겼다고 하니 도무지 마음이 놓이질 않았거든요. ”
이달 초 세브란스 심장혈관병원 외래 진료실. 심방세동 진단을 받은 지 한달 여만에 내원한 서경자(73·가명) 씨가 한결 편해진 표정으로 진료실을 나섰다. 심방세동은 심장박동이 불규칙해지는 질환이다. 심방 쪽에서 비정상적 전기신호가 생성돼 정상적으로 수축하거나 이완하지 못하면서 심장 리듬이 깨진다. 그로 인해 가슴이 답답하거나 어지럽고 숨이 차는 증상을 보이는데 가슴 뛰는 것에 무감각해져 증상을 느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심방세동이 위험한 이유는 불규칙한 심장 박동에 의해 심장 내 혈액이 고여 혈전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혈전이 혈류를 타고 흐르다가 뇌 또는 심장혈관으로 흘러 들어가 혈관을 막으면 뇌졸중, 심장마비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고령이거나 고혈압·당뇨병·이상지질혈증 등 심뇌혈관계 위험인자가 많고 오래될수록 심방세동·심근경색증·뇌졸중 같은 합병증이 발생할 위험이 높아진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23년 심방세동으로 의료기관을 찾은 환자 중 약 84%에 해당하는 24만 6776명이 60세 이상으로 집계됐다.
서씨는 고혈압, 이상지질혈증 진단을 받은지 20년도 넘어 약을 먹는 데 이골이 났다. 몇 달 전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어지러워도 나이 탓이라고만 여겼는데 심장에 또 다른 문제가 생겼다니 덜컥 겁이 났다. 그런 마음을 읽은 걸까. 주치의인 이찬주 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 교수는 서씨에게 안저검사를 권했다. 안구 뒤쪽 내벽에 ‘망막’이라는 얇은 신경조직이 붙어 있는데 간단하게 안저사진을 찍기만 하면 망막질환, 녹내장, 백내장 의심 여부와 함께 심혈관 위험도 점수를 확인할 수 있다는 것. 실제 안저검사는 서씨처럼 고혈압 유병기간이 매우 긴 환자에게 정기적으로 권유되는 검사다.
혈압이 높은 상태가 지속되면 혈관을 이루고 있는 근육과 내피 세포가 손상 받아 망막에 혈액이 고이고 그로 인해 시력장애가 유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는 ‘고혈압망막병증’이라고 한다. 고혈압약을 그토록 오래 복용하면서도 안과검사는 받아본 적이 없었다는 서씨는 이번 검사를 통해 ‘백내장 의심’ 소견이 확인돼 안과 진료가 의뢰됐다. 자칫 놓칠 뻔한 백내장을 조기에 발견할 수 있는 기회까지 얻은 셈이다.
서씨가 받은 검사는 망막 촬영으로 심근경색, 뇌졸중, 심부전 같은 심혈관질환의 발생 위험을 예측하는 인공기능(AI) 의료기기 ‘닥터눈’이다. 국내 의료 AI 기업인 메디웨일이 2020년 12월 식품의약품안전처의 혁신의료기기 지정을 거쳐 2022년 8월 심혈관 위험평가 의료기기 품목허가를 받았다. 심혈관질환의 발병 위험도를 예측하는 AI 의료기기가 상용화에 성공한 세계 첫 사례다. 닥터눈은 작년 6월 평가 유예 신의료기술로 확정 받아 약 3년 동안 외래진료 환자에게 비급여로 처방이 가능해졌다. 환자는 기본적인 안저검사 비용 외에 5~10만 원 가량을 추가 부담하면 된다. 이 기간 축적된 임상을 근거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 평가를 통해 급여 여부가 결정될 예정이다.
검사를 받은 환자에게는 망막 촬영 이미지 원본과 닥터눈이 분석한 혈관 모습이 담긴 검사결과지가 제공된다. 닥터눈 심혈관위험점수와 그에 상응하는 관상동맥석회화지수(CASS) 등도 확인할 수 있다. 서씨의 경우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 내부에 최소한 경미한 정도의 죽상동맥경화 플라크(침전물질)가 있는 상태로, 경도 또는 최소한의 관상동맥 협착이 존재한다는 진단이 나왔다. 5년 이내 심혈관질환이 발생할 위험은 1~5% 수준으로 중위험군에 해당한다는 안내와 함께 고위험군 진입을 최대한 늦추기 위한 생활 수칙도 제시됐다. 자그마한 동공을 넓히는 산동 과정이 불필요한 데다 대기시간을 제외하면 촬영부터 AI 분석까지 소요시간이 1분 남짓이라 현장에서 체감하는 환자들의 만족도는 높다.
이 교수는 “망막은 우리 신체에서 동맥·세동맥·모세혈관·세정맥·정맥 등 모든 종류의 혈관을 직접 관찰할 수 있는 유일한 조직”이라며 “망막의 세동맥은 심장, 뇌의 세동맥과 비슷한 특성을 갖는다”고 설명했다. 고혈압, 당뇨병 등 심뇌혈관계 위험인자를 가진 환자에서 망막의 혈관 변화를 관찰하면 고혈압에 의한 심장과 뇌의 혈관 변화를 유추하는 것은 물론 심뇌혈관질환의 위험도 평가에 도움이 된다는 의미다. 이러한 시장성을 보고 구글을 비롯해 AI 사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는 다수 국내외 기업들이 망막 촬영을 통한 질병 예방·관리 기술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닥터눈은 국내 5년 추적관찰 코호트 임상시험에서 심장 컴퓨터단층촬영(CT)과 동등한 수준의 심혈관질환 예측력을 입증했다. 임상현장에서 심혈관질환의 예방 및 관리 용도로 권장되는 ‘관상동맥석회화지수(CACS·Coronary Artery Calcium Score)’에 기반해 방대한 양의 망막 영상 데이터로 AI 학습과 검증 과정을 거친 덕분이다.
세브란스병원은 올해 1월 상급종합병원 중 최초로 안과에서 닥터눈 처방을 시작했다. 7월부터는 심장혈관병원과 내분비내과에 선제 도입해 처방하고 있다. 이 교수는 “상급종합병원을 찾는 환자들은 고혈압 같은 만성질환부터 심근경색증, 뇌졸중, 심부전 등에 이르기까지 중증도가 매우 다양하다” 며 “주위에서 흔히 겪는 고혈압, 이상지질혈증을 오랫동안 방치하면 일종의 심뇌혈관계 합병증인 협심증, 심근경색증, 뇌졸중 등이 생길 수 있다. 위험인자가 있을 때 운동, 식이요법, 약물요법 등을 통해 질병이 발생하는 것을 미리 막는 ‘일차예방’이 매우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그는 이어 “기존에 심혈관질환 진단 용도로 쓰이던 경동맥 초음파보다 간편하고 정확하면서도 심장 CT가 가진 방사선 노출 문제와 접근성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AI 의료기기가 도입돼 고무적”이라며 “중증 치료가 필요하기 전 예방 및 관리 차원에서 환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강조했다.